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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를 만났습니다. (04172016)

글쓴이 : LA연합감리교회 날짜 : 2016-04-16 (토) 11:00 조회 : 361

"동주"를 만났습니다.

 

저는 영화를 자주 보는 편은 아닙니다. 우선 어두컴컴한 극장에 들어가 앉아 있는 것에 익숙지 않고, 다른 사람이 짜놓은 틀에 빠지는 것이 편치 않습니다. 더구나 제가 좋아하는 영화는(철학적 메시지를 주고, 깊이 생각하게 하고, 재미보다는 의미를 주는) 대부분 주류 극장에서 환영받지 못합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몇 년에 한 번 겨우 극장에 가는 형편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꼼짝없이 극장에 가게 되었습니다. 총남선교회에서 주최하는 단체관람을 핑계로 오랜만에 극장 구경을 가게 되었습니다. 중고등학교 시절 영화 단체관람이 있었습니다. 이순신 장군과 같은 역사적 인물을 통해 민족정신을 고취한다든지, 반공 영화를 보러 가는 수준이었습니다. 영화의 내용은 둘째치고 학교 수업을 대신해서 밖에 나가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그럭저럭 시간을 채우고 나면 늘 학교에만 갇혀있던 학생들의 오후는 훨훨 날고 있었습니다.

 

그런 추억을 떠올리며 교회에서 단체로 영화를 보러 LA 한인타운 한복판으로 갔습니다아담한 쇼핑센터 맨 꼭대기 층에 있는 극장은 다른 극장처럼 십수 개의 상영관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150명 정도 들어가는 몇 개의 상영관을 둔 극장입니다한국에서 개봉되는 최신영화에는 영어 자막을 넣어 한국어에 서툰 외국인이나 2세들도 영화를 통해 한국 문화를 접할 기회를 주고외국 영화에는 한국 자막을 붙여 외국어에 서툰 1세들도 최신 영화를 편하게 볼 수 있는 곳입니다총남선교회에서는 $10이 넘는 극장표를 $5에 제공했습니다물론 값도 쌌지만무엇보다도 좋은 영화를 뜻맞는 사람들과 함께 본다는 기대감을 안고 70명이 극장 앞에 모였습니다한인타운 한복판에서 교우들 한두 명만 만나도 반가운데 수십 명의 교우를 한 번에 만나는 색다른 감동을 누렸습니다표를 받아들고 극장 안으로 들어가는 교우들은 중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간 듯했습니다극장구경에는 역시 팝콘과 콜라가 있어야지요이미 큰 통에 팝콘을 하나 가득 담고 나누어줄 데를 찾는 교우들의 사랑으로 팝콘을 한 아름 안고 자리에 앉았습니다넓고 푹신한 의자에 기대어 사진도 찍고 앞줄 뒷줄에 앉은 교우들과 인사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영화가 시작되었습니다.

 

"동주이번에 교회에서 단체로 본 영화입니다. 1917년에 태어나 1945년 해방을 몇 달 앞두고 감옥에서 쓸쓸히 병사한 천재 시인 "윤동주"의 일생을 흑백필름으로 담담하게 담아낸 작품입니다영화는 이름꿈마저도 허락되지 않았던 어두운 시대를 산 두 청년을 주인공으로 내세웠습니다시와 문학을 통해 세상에 묵묵히 저항하는 윤동주와 혁명가로서 무력으로 세상을 바꾸기를 꿈꿨던 윤동주의 동갑내기 사촌 송몽규의 겹칠 듯 비껴가는 인생에서 70년의 시차를 뛰어넘어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우리 안에도 사상가의 정적인 모습과 혁명가의 동적인 모습이 마주하기 때문입니다신앙으로 이야기하면 믿음과 행함이 교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동주"는 그 두 가지가 다르지 않음을 이야기합니다아니 오히려 그 둘은 같은 것임을 말합니다.

 

영화에서 윤동주가 읊던 "자화상"이라는 시가 나옵니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홀로 찾아가선/가만히 들여다 봅니다/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가을이 있읍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 보니 사나이는/그대로 있읍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읍니다"

 

70여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아름다운 청춘, 미완의 청춘 "동주"를 만났는데 저도 그가 미워졌습니다. "동주"가 시대를 잘못 타고 태어난 것도 미웠고, 몇 달만 더 견뎠으면 살 수 있었을 걸 그 몇 달을 견뎌내지 못한 것도 미웠습니다. 그의 눈물과 고통은 쏙 빼놓은 채 시에 담긴 감수성과 문학성만 바라보던 저도 미워졌습니다. "동주"를 다시 만났습니다. 조금 더 가까이 "동주"를 만났습니다. 조금 더 깊게 "동주"를 만났습니다. 좋은 영화 보여주신 총남선교회에 감사드립니다. 영화도 영화였지만 "동주"와 만난 여운을 오랫동안 함께 나눌 수 있는 교우들 때문에 행복한 주일 오후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