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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선물 (10082017)

글쓴이 : LA연합감리교회 날짜 : 2017-10-07 (토) 14:07 조회 : 49

마지막 선물

 

 "목사님 먼 데까지 오시지 마세요!" 플러턴의 한 양로 병원에 계신 조옥희 사모님을 찾아뵙겠다고 했더니 따님이신 이혜선 집사님이 저를 말리셨습니다. "멀기는요이번 목요일(9 28오전에 들릴게요." 미안해하시는 집사님의 말은 못 들은 척하고 조옥희 사모님과 같은 속회에서 오랫동안 신앙 생활하시는 정영호 장로님 내외와 함께 심방 길에 나섰습니다양로병원에 들어서자 조 사모님은 따님과 함께 환하게 웃으시면서 저희를 맞으셨습니다정정옥 장로님을 오랜만에 본 조 사모님은 "예뻐졌어더 젊어 보이는데"라고 하셨습니다정영호 장로님이 농을 걸어오셨습니다. "저는요?" 더 멋있어졌다는 공치사라도 들으려고 던진 말인데 "정 장로는 똑같은 데 뭘." 하시는 조 사모님의 재치있는 답변에 모두가 웃었습니다.

 

가을 햇살이 빼곡히 들어찬 양로병원의 정원에서 예배가 시작되었습니다.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일세" "아 하나님의 은혜로"를 찬송하는데 조 사모님께서는 1절부터 4절까지 모두 외워서 부르셨습니다찬송 끝나고 제가 물었습니다. "아니 어떻게 가사 하나 안 틀리시고 외워서 부르세요." 조 사모님은 물어보는 제가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 퉁명스럽게 대답하셨습니다. "그야 뭐 주일학교 때부터 불렀는데요."

 

예배를 마치자 정정옥 장로님께서 조 사모님께 드리는 선물이라며 조그만 쇼핑백을 내놓으셨습니다그 안에는 황금색 상자가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한 번 열어보세요"라는 말에 조 사모님은 황금색 상자를 조심스레 여셨습니다그 안에는 플래시 라이트조그만 손 비누그리고 로션이 담겨 있었습니다. 94세에 거동이 불편하셔서 휠체어에 앉아 계신 조 사모님은 선물을 받아들고는 기뻐하셨습니다. "이건 씻으실 때 쓰시고요이건 손에 바르시면 돼요플래시 라이트는 밤에 불 켜기 힘드시니까 이걸 켜시고 화장실 다녀오시면 돼요." 옆 침대에 계신 분에게 방해될까 봐 밤에도 불을 안 켜신다는 말을 듣고 준비한 선물이었습니다.

 

그런데조 사모님은 그 불을 한 번도 켜보지 못하고 그날 오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습니다저녁 7시쯤 조 사모님의 사위 되시는 이종남 집사님께서 전화를 주셨습니다오전에 심방 갔을 때 뵙지 못해서 인사차 주신 전화로 여기며 통화를 시작했습니다그런데목소리가 심각했습니다. "어머님께서 방금 평안히 가셨습니다." 제 귀를 의심했습니다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찬송가를 외워서 부르실 정도로 건강하셨는데 믿기지 않았습니다.

 

오전에 함께 예배드렸던 그 자리를 향해 달려가는데조 사모님의 인생이 제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습니다조 사모님은 1923년 감리교 목회자의 딸로 태어나 세브란스 간호전문학교를 졸업하시고 간호사로 일했던 신여성이셨습니다감리교신학대학의 교수요 신학자였던 고 고영춘 목사님과 결혼하셔서 사모의 길을 걸으셨습니다남편을 일찍 여의고 아이들과 함께 미국에서 이민 생활을 시작하신 개척자셨습니다평생 불평 한마디 없이 기도로 삶의 굴곡을 이기며 사신 믿음의 어머니셨습니다양로병원에는 가족들이 모여 있었습니다당황스럽기는 모두가 마찬가지였습니다오전에 건강하셨던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도저히 믿을 수 없었습니다그래도 평안히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신 마지막 모습이 모두에게 위로가 되었습니다.

 

플래시 라이트손 비누그리고 로션은 조옥희 사모님이 이 세상에서 마지막 받으신 선물이었지만 한 번도 사용하지 못하고 가셨습니다그 선물을 받고 조심스레 상자를 여시며 내용물을 확인하시던 사모님의 다소곳한 모습이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어쩌면 그 플래시 라이트는 빛나는 천국을 향해 어둠을 뚫고 나가는 그 길을 밝혔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손 비누와 로션은 주님을 만나기 전 영혼을 깨끗이 하는 데 쓰였으리라는 상상도 해 보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고 조옥희 사모님은 마지막 선물만 받고 떠나지 않으셨습니다오히려 우리에게 마지막 선물을 남기고 가셨습니다우리 곁을 떠나시던 날 함께 예배드리며 불렀던 찬송에 이런 가사가 나옵니다. "세상사는 동안에 나와 함께 하시고 세상 떠나가는 날 천국 가게 하소서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써있네." 그 찬송의 고백 그대로 이 땅에서 주님과 동행하시다 세상 떠나가는 날 천국에 가신 고 조옥희 사모님이 일생 지켜오신 믿음이야말로 가족들과 믿음의 후배들에게 남기신 마지막 선물이었습니다.